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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 예방 손목시계? 한국선 감옥 간다"

작성자 고재연 기자 입력 2017-11-20 17:32:57 수정 2017-11-21 09:18:27
혁신성장, 규제부터 깨라

한경·무역협회 설문 "신사업 구상단계서 포기" 33%
ICT·바이오·핀테크 벤처 여전히 낡은 규제에 '질식'

5대 신사업 벤처들 "사업하다가 법률 전문가 될 판"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붙박이 규제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해당 산업은 성장한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택배업은 우체국 독점 사업이었다. 1997년 ‘기업 활동 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면서 택배업 허가제가 폐지되고 운임도 자율화됐다. 민간업체가 대거 시장에 진출하자 가격이 싸지고 배송 시간도 단축됐다. 1997년 연간 1억6000만 개이던 택배 물량은 지난해 20억5000만 개로 13배가량으로 성장했다. 택배산업의 발달은 한국을 홈쇼핑, 온라인 쇼핑 강국으로 바꾸는 분수령이 됐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한국의 신산업은 ‘우체국 택배 독점’ 시절의 규제에 포위돼 있다.

규제로 인해 사업이 안착하지 못하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24시간 카풀’을 놓고 서울시와 갈등을 빚고 있는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풀러스, 전세버스를 이용해 이동 경로가 비슷한 사람을 태우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다 택시업계의 반발과 서울시 규제로 서비스를 포기한 콜버스랩이 대표적이다.

“사업을 하다가 법률 전문가가 됐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나온다. 국내 바이오 스타트업 휴이노는 뇌졸중 환자들을 위해 심전도를 측정해주는 손목시계를 개발했다. 손목시계를 통해 측정한 심전도 정보는 실시간으로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에 전송된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분석 프로그램이 건강 이상 신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환자는 의사에게 이 정보를 보내 원격 상담이나 화상진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이런 서비스를 만나볼 수 없다. 의사와 환자 간 원격의료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휴이노는 국내 서비스를 포기하고 미국 서비스를 먼저 준비하고 있다. 길영준 휴이노 대표는 “헬스케어 서비스를 하려는 순간 ‘범법자’가 될 위험에 처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규제에 발목이 잡혀 시장 선점 시기를 놓친 사례도 많다. 핀테크(금융기술)업체인 한국NFC는 2015년 신용카드를 휴대폰 뒷면에 가져다 대면 공인인증서 없이도 간편하게 본인 인증을 한 뒤 결제할 수 있는 간편 결제 시스템을 개발했다. 금융당국은 여덟 개 카드사에 보안성 심의를 받으라고 했다. 한 카드사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여덟 개 중 네 개 카드사의 테스트를 통과할 즈음에 해당 규제의 적용을 받지 않는 삼성페이 페이코 등 간편 결제 시스템이 30개가량 출시됐다.

한국NFC는 이 같은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휴대폰만 있으면 카드 단말기를 대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이번에는 여신전문금융업법이 발목을 잡았다. 여신금융협회가 보안성 심의를 위해 카드 단말기 인증을 받을 것을 요구한 것. 스마트폰 앱(응용프로그램)이 카드 단말기 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카드 단말기에 적용되는 규제를 적용한 사례다. 황승익 한국NFC 대표는 “당국은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성벽을 높이는 방식으로 규제를 만들고 있다”며 “사력을 다해 기술력을 끌어올린 기업들로선 죽을 맛”이라고 토로했다.

정부는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혁신 성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국내 규제는 혁신 성장 기조와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무인이동체 △정보통신기술(ICT)융합 등 5개 신산업 관련 기업 238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 중 45%가 규제로 신사업 추진에 차질이 있다고 했다. 이 중 33.2%는 사업 구상 단계에서 포기, 31.9%는 사업이 지연된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안근배 한국무역협회 무역정책지원본부장은 “혁신성장을 가로막는 모든 규제를 사전 허용, 사후 규제의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고 낡은 규제를 정비하려는 정부 당국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한국경제신문은 5개 신산업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각종 규제의 실상과 작동경로를 파헤쳐 시리즈로 내보낸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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